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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러시아의 조선해양은 어디를 바라보고 있는가!
2020-01-06 고정화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무역관

  강남영 한국조선해양기자재공업협동조합 러시아 지사장  




19913월 러시아에 첫발을 디디면서 기나긴 나의 러시아 인생은 시작됐다. 당시는 아직 소련 시절이었고 우유를 사기 위해서는 새벽부터 상점 앞에서 긴 줄을 서야만 했다. 금방 동이 나버려 우유를 사지 못해 어깨가 축 늘어진 아주머니의 뒷모습이 지금도 가슴에 애잔하게 남아 있다. 세계 최대의 맥도널드 점포가 푸시킨 광장에 들어서고 빅맥을 먹기 위해서는 2시간을 기다려야만 했다. 그 인파 중에는 나도 함께 있었다. 소련 정부가 수급이 제대로 되지 않는 설탕과 보드카를 나눠주기 위한 딸론이라는 배급표도 있었다. 당시 대학원에서 공부하던 나는 교수님들에게 보드카 딸론을 최고의 선물로 드리곤 했다.

 

30년 가까이 훌쩍 지난 201912, 오늘의 러시아를 당시에 과연 누가 예측이나 할 수 있었겠는가. 지금은 택시 호출 서비스나 인터넷, 모바일 서비스는 한국보다 훨씬 더 편한 사용자 친화적 시스템으로 운영된다. 10여 년 전만 해도 러시아에 온 출장자들에게 건널목을 건널 때 각별한 주의를 당부했다. 지금은 정반대로 한국에 온 러시아 출장자들에게 주의를 당부해야 하는 역전의 상황이 됐다. 이제는 건널목에서 초록 신호로 바뀔라치면 러시아 사람들이 100m 달리기를 하는 모습을 보면서 자본주의 체제가 깊게 스며들고 있는 것을 느끼게 된다. 예전의 인간적인 모습이 너무 빨리 사라져 가는 것은 아닌가 하는 아쉬움이 남을 정도로 급격히 변하고 있다.

     

지금 나는 3번째 주재를 하고 있다. 처음은 S모 그룹에서 시작해서 해당 그룹 중공업에서 모스크바 주재를 마쳤다. 2번째는 TRC Korea라는 회사의 현지 법인을 만들어 사업의 토대를 일궜다. 기업의 주재원으로 근무하는 것과 직접 현지 법인을 만들어 운영하면서 주재를 하는 것은 극명한 차이가 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주재 수당을 받는 것과 현지 직원들의 급여를 지급해야 하는 차이부터 시작해서 자금 사정으로 인원을 충분히 두지 못하니 법인 사무실 운영에 필요한 사소한 일부터 그 어렵다는 대관업무까지 처리해야 하는 만만치 않은 일들을 해결해야 했다. 기업의 주재원으로 생활하면서 쌓은 경험과 현지 법인의 대표로 쌓은 경험이 합쳐져 이제 한국조선해양기자재공업협동조합의 현지 지사장으로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주재하고 있다.

 

20187월 한국의 산업통상자원부 조선해양 관련 부서와 한국조선해양기자재연구원 그리고 한국조선해양기자재공업협동조합이 함께하는 러시아 사절단에 합류를 했다모스크바에서 러시아 조선통합공사(USC, United Shipbuilding Corporation)가 주관하는 세미나에 참석하고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발틱조선소를 견학하는 프로그램으로 구성됐다. 나는 한국조선해양기자재연구원의 자문위원 자격으로 참여했다. 공식 프로그램을 마치고 별도로 주요 기자재 바이어 4곳을 방문해 러시아 기자재 시장현황 조사와 공급 체계 및 협업 가능성에 대한 논의했다. 이 과정에서 우리가 몰랐던 러시아만의 특이한 기자재 공급 프로세스에 대해 이해할 수 있게 됐다. 이 말은 그동안 우리 기자재의 러시아 시장 진출을 위한 기반 구축의 노력이 없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했다. 사실 S중공업에서 나와 주재를 했고 1년여 전부터 기자재 수출에 큰 노력을 기울였던 나조차도 이런 중요한 사안들을 놓치고 있었으니 누구를 탓할 일도 아니었다. 하루 일정으로 러시아 바이어 4곳과 빡빡한 미팅 후 저녁 식사 자리에서 한국 조합의 H실장이 내년에 우리 조합에서 러시아 지사를 개소할 예정입니다. 혹시 같이 일해보실 생각 없으세요?”라고 묻는다. “무슨 말씀인지요?"

 

이렇게 시작된 인연으로 한국조선해양기자재조합의 러시아 지사는 2019724일 조합 강호일 이사장, 상트페테르부르크 대한민국 총영사관 권동석 총영사, KOTRA 김정훈 상트페테르부르크 관장을 비롯한 러시아 조선통합공사의 나볼롯츠키 벤더개발국장과 상트페테르부르크주 관계자가 참여한 가운데 성대하게 치러졌다. 나는 우리 대한민국 기자재가 러시아 시장에 진출할 수 있는 기반을 다지기 위한 비전과 미션을 발표했다. 양국의 조선 관련 기관과 기업에 우리 한국 조합의 러시아 지사가“One Stop Solution Provider”로서의 역할을 하겠다고 힘줘 발표했다.

 

9월에는 격년제로 열리는 러시아 최대 조선해양관련 전시회 NEVA20여 개의 국내 기업들이 전시회 및 상담회에 참가했다. 러시아 조산통합공사가 주최한 -러시아 공급자의 날”(Korean Russian Suppliers’Day)이라는 타이틀의 세미나도 개최됐다. 우리 기자재 기업들에는 생산품목을 소개할 기회가 주어졌고 러시아 조선통합공사 산하 조선소들은 구매를 희망하는 기자재에 대해 발표했다. 이 행사는 러시아 조선통합공사가 모든 비용을 부담해 개최한 것으로 한국 기자재 기업들에 대한 러브콜의 의미가 있는 매우 중요한 행사였다.

 

10월에는 러시아 NEVA 전시회와 같은 성격의 전시회인 KORMARINE 2019가 개최돼 러시아 바이어 초청 상담회 및 전시 참여 국내 기업들과 개별 협상을 진행했다. 이 과정에서 작지만 매우 의미 있는 실제 수출 계약이 체결되었다. 나는 콘퍼런스에서 대한민국 기자재의 러시아 시장 진출 전략발표를 했다. 한국 조합의 러시아 지사가 개소 후 3개월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 추진한 경과 및 실적을 보고했으며, 한국 기자재 기업들이 왜 러시아 시장으로 달려 나가야 하는지 강력하게 주장했다.

 

러시아는 2014년 우크라이나 사태로 미국을 비롯한 서방으로부터 강력한 제재를 받고 있다. 러시아도 서방에 대해 역으로 제재를 하는 상황이다 보니 기존에 형성됐던 조선해양기자재 공급 체인이 무너져 버렸다. 이로 인해 선박 건조에 문제가 되고 있고 동시에 조선소 및 건조기술의 노후화가 심화돼 조선해양산업 전반에 걸쳐 심각한 문제에 봉착하게 됐다. 실제로 어선의 경우 평균 선령이 26년으로 5000여 척의 어선 중 80%가 이미 폐선의 단계에 이르렀다. 러시아 정부는 이를 극복하기 위해 선주사들에게 러시아 영토 내에서 어선을 건조하는 경우 추가 어획 쿼터를 제공하는 인센티브 제도도 운용하고 있다. 기자재의 경우 서방으로부터의 공급체인망의 붕괴로 디젤 엔진과 발전기, 보일러, 갑판 장비, 수처리 설비 등은 조달에 매우 심각한 상태에 다다랐다. 중국산 기자재가 문제 해결에 어느 정도 도움이 되고 있으나 품질 부분에 있어 여전히 신뢰를 주지 못하고 있어 한국산 기자재의 공급에 목말라하고 있다. 한국 조합의 러시아 지사가 개소한 지 3개월 만에 러시아 바이어들이 요청한 견적에 대응한 금액이 300억 원을 웃돌고 있는 것이 이를 반증하고 있다.

 

우리 조선 3사도 러시아에서 많은 협력 사업을 만들어내고 있다. 단순히 국내 조선소에서 건조 후 인도를 하는 것이 아닌 좀 더 전방위적인 기술협력도 추진하고 있다. 현대삼호의 아프라막스급 유조선 건조를 위한 기술 지원, 삼성의 쇄빙LNG캐리어 설계기술 지원 등의 활동이 있다. 한국 기자재 기업들도 러시아 파트너들과 함께 현지화를 추진하고 있다. 판형열교환기의 일부 부품의 현지 제조를 위한 기술이전과 초저온밸브 제작을 위한 표면코팅기술 이전 등이 대표적인 사례다. 러시아 정부는 외국 기업들이 러시아 파트너들과 현지화 작업을 보다 적극적으로 추진해 주기를 강력히 희망하고 있으며 현지화 비율이 30%(2019년 기준)를 넘으면 입찰에서 15%의 가격 가점을 제공하는 제도가 있다. 한국 기업들에는 매우 좋은 기회다.

 

10월 부산에서 KORMARINE 전시회를 마치고 보고서를 작성하기도 전에 러시아 조선통합공사의 벤더개발국장으로부터 긴급 지원을 요청하는 전화를 받는다. 공사 회장님이 한국을 방문할 예정인데, 우리 기자재 기업 중에 중견급으로 3, 4개 기업과 면담을 했으면 한다는 내용이다. 주말을 빼고 달랑 이틀 여유가 있었다. 기존에 협업하고 있는 기업 중에서 현지화를 추진하고 있거나 고려하고 있는 기업 몇 곳을 선정해서 회의에 참석했다. 조선통합공사 회장이 기자재에 대한 깊이 있는 이해를 하는 것에 적잖은 감명을 받는다. 얼마 지나지 않아 회장으로부터 소중한 자리를 만들어줘서 감사하다는 말씀과 함께 참석 기업 중 2곳과 협약 체결을 요청을 받았다. 사실상 공사 산하 30개 조선소와 13개 설계회사에 기자재를 공급할 수 있는 메이커리스트에 등재해준 것이다. 이렇게 멋지게 우리 기자재의 러시아 시장진출을 위한 또 하나의 작은 산을 넘어간다.

 

영업맨들이 시장을 분석할 때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해당 시장의 니즈일 것이다. 시장이 필요로 하는 것이 무엇인지 그 이유는 무엇인지 알게 되면 시장 진입에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러한 필요조건을 충족시킬 수 있다고 성공적인 시장 진입이 가능할 것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시장이 필요로 하는 것보다는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그것을 어떻게 충족시켜줄 수 있는지 분석을 하고 그에 따라 적절한 제품 공급을 한다면 바이어는 좀 더 쉽게 지갑을 열고자 할 것이다. 나는 이것도 많이 부족하다는 생각이다. 우리가 아파서 고통을 받고 있을 때 의사를 찾아간다. 이때 대부분 의사 선생님이라고 칭한다. 비록 나이가 많이 어릴지라도 말이다. 그런데 이 의사 선생님은 우리가 아파서 고통을 받는 것을 해결해 주니 얼마나 고마운 사람인가. 그러니 새파랗게 젊은 의사에게 선생님이라는 호칭을 쓰지 않겠는가. 시장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진출하고자 하는 시장이 겪고 있는 고통이 무엇인지 조사하고 그 고통을 해결해 줄 수 있는 솔루션과 제품을 제시하면 그 시장의 모든 사람이 참 고마워할 것이다. 러시아가 조선해양기자재라는 시장에서 고통받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을 해결할 방법은 무엇일까. 그중 가장 크게 고통받고 있는 것이 엔진을 비롯한 추진기관과 갑판 장비와 수처리 장치다. 갑판 장비는 극지방을 항해하는 경우 아이스 클래스 소재의 적용으로 한국에서 제작해 공급하는 것은 어렵지만 기술이전의 방법으로 얼마든지 극복해 나갈 수 있다. 수처리 장치는 단계적 현지화를 통해 시장 점유율을 극대화할 방법이 있다. 이렇게 진출하고자 하는 시장이 고통을 받는 것을 분석해내고 해결책을 제시하면 러시아 바이어들은 한국 기자재 기업들에 정말 고마워할 것이다.

 

러시아는 한국으로부터 개별 기자재의 현지화 지원뿐만 아니라 개념설계를 비롯한 초기 엔지니어링 서비스(FEED, Front End Engineering Design)부터 시작해서 기본설계, 상세설계에 이어 생산설계 걸친 협업이 필요하다. 현지 조선소 상황에 맞는 건조과정에 대한 기술 지원(Supervision)도 원하고 있다. 한마디로 선박의 설계부터 건조에 이르는 전체 공정에 걸친 협업이 이뤄지길 희망하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대응을 해야 하는가. 개별 기업이 이러한 포괄적인 협력을 추진하기는 쉽지 않다. 국가적 차원에서 그리고 대승적인 관점에서 추진이 필요하다. 한국 조합은 '-러시아 조선해양기자재클러스터'를 기획하고 있다. 나는 이 클러스터가 양쪽 국가 정책 입안자들의 모임과 같은 행사를 위한 것으로 한정돼 기획되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양쪽 국가의 조선소, 설계회사, 기자재 기업이 함께 참여하는 실제 비즈니스 모임이 돼야 한다. 그럴 때 우리는 러시아가 힘들어하고 있는 고통을 감싸 안아 줄 수 있다. 바로 그곳에서 돈의 향기가 물씬 피어난다.

 

우리 한국조선해양기자재공업협동조합의 러시아 지사가 약 3개월의 짧은 기간에 소중한 수출 실적을 만들어 낼 수 있었고 러시아 조선해양 시장의 현황조사 및 분석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상트페테르부르크 대한민국 총영사관과 KOTRA 상트페테르부르크 무역관의 도움 없이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이 자리를 빌려 감사의 말씀을 전한다.

 

나는 한국 기자재 기업과 엔지니어링 서비스 기업들이 독자적인 해외시장 진출을 이루어 낼 수 있는 시장으로 러시아가 최적이라고 판단한다. 그리고 우리의 제품력과 기술력은 러시아가 겪고 있는 고통을 해결해 줄 수 있는 최적의 솔루션이라고 확신한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바이어를 만나러 뛰쳐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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