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형 재난 대비용 키트 보급이 필요하다

이동준 후쿠오카 한국교육원 행정실장

2011년 3월 11일에 일본 미야기현 센다이 동쪽에서 발생한 지진(동일본 대지진)은 1만5000명이 넘게 사망한 사상 최악의 지진이었다. 일본은 다른 국가에 비해 재난이 상대적으로 많아 재난 대비가 잘 돼 있다고 하지만, 일본 관측 사상 최대 규모인 9.0의 초대형 지진에는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었다.

그로부터 5년이 지난 4월 16일에는 관할 지역인 규슈 구마모토현에서 진도 7.3 규모의 강진으로 1100여 명 이상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한편, 우리나라에서는 경주에서 지난 9월 12일에 규모 5.8의 지진이 발생했는데, 이는 국내에서 지진을 관측하기 시작한 1978년 이후 우리나라에서 발생한 지진 중 가장 큰 규모였다. 올해 있었던 구마모토와 경주 지진을 계기로 규슈와 한반도가 더 이상 지진의 안전지대가 아니라는 인식이 확산됐고, 현재도 여진이 계속 진행되고 있어 주민들이 불안에 떨고 있다.

지진 등 각종 재난이 발생하면 즉시 대피해야 하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이야기이다. 이 때 무엇을 가지고 나와야 할까? 지갑, 충전기, 보조 배터리, 그리고 또 무엇을 가지고 가야 하지? 안전을 지키려면 한 시라도 빨리 탈출해야 한다는 두려운 마음에 이성적으로 판단할 여유가 없어진다.

일본에서는 동일본 대지진을 경험했던 사람들이 재난이 발생했을 때 꼭 챙겨야 하는 물품 20~30가지를 엄선해 ‘재난 대비용 키트’라는 이름으로 판매하고 있다. 판매 회사별로 구성 물품 및 가격이 상이하나, 대부분 10만~20만 원 전후의 가격대를 형성하고 있으며 주요 구성 물품으로는 물, 비상식량(건빵, 칼로리메이트, 각종 즉석 식품 등), 휴지, 야외용 침구류, 비옷, 장갑, 양초, 손전등, 다기능 충전기, FM 라디오, 건전지, 핫팩, 마스크, 구급약품 세트 등이다. 일본의 인터넷 쇼핑몰에는 이러한 피난용 세트 수십 여 종이 올라와 있으며, 특히 인기 쇼핑몰인 ‘라쿠텐’에서는 이러한 피난용 세트를 판매하는 ‘방재 세트’라는 카테고리를 별도로 운영하고 있을 정도로 인기가 높다.

그에 비해 우리나라의 유명 인터넷 쇼핑 웹사이트에서 이러한 재난 대비용 키트를 검색하면 구급약, 비상식량, 라디오, 침구류 세트를 모두 따로따로 구입해야 하고, 일본과 같은 재난 대비용 키트는 종류도 얼마 없을 뿐더러 대부분 일본에서 해외 직배송 형태로 판매되고 있다.

일본에서 판매하는 재난 대비용 키트의 수입을 검토하는 사례도 있었지만, 이는 키트 구성 물품 중에 식품과 의약품이 포함돼 있어 통관을 위한 검사에 상당한 시일이 소요될 우려가 있다. 검사 절차가 까다로운 물품은 한국에서 제작하고, 이를 제외한 나머지만 일본에서 수입하는 혼합형 키트도 검토해볼 수는 있겠지만, 일본의 재난 대비용 키트 구성 물품을 보면 대부분 우리나라에서도 충분히 생산하고 조달할 수 있는 물품들이기 때문에 굳이 외국에서 수입할 이유는 없으리라 판단된다.

이제는 우리나라에서도 우리 실정에 맞는 ‘한국형 재난 대비 키트’의 개발과 보급을 적극적으로 검토해야 한다. 지진 등 각종 재난이 발생하게 되면 일단 탈출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데, 이 때 피난을 위한 물품을 주섬주섬 챙기다가 골든타임을 놓치게 되면 돌이킬 수 없는 상황에 처하고 만다. 일본의 재난 대비용 키트를 참고해 가정마다 이러한 재난 대비용 키트가 비치될 수 있도록 하고, 유사 시 이것만 가지고 탈출할 수 있도록 홍보해 사람들의 인식을 전환시킬 필요가 있다. 이는 생존과 직결된 중요한 문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