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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 기고] 이제는 말할 수 있다 – 아프리카 한국인 사진관 전성시대의 비결
  • 외부전문가 기고
  • 김주영
  • 2014-04-24
  • 출처 : KOTRA

 

이제는 말할 수 있다 – 아프리카 한국인 사진관 전성시대의 비결

김용빈 개발마케팅연구소장

 

 

 

파리 공항에서는 서울로 가는 대한항공편이 뜨는 시간에 맞춰 화장품 매장마다 한국어를 구사하는 직원들이 나와 있을 정도로 화장품이 인기다. 미국산 브랜드 화장품도 원조의 자부심을 더하는, 그야말로 패션과 멋의 도시 파리가 한국인을 대상으로 이와 같이 서비스를 하는 것이 놀랍다.

 

북적이는 한국 여성들 사이를 비집고 이것 저것 둘러보다가, 영어를 잘하는 젊은 판매원 아가씨에게 아내에게 줄 선물을 고르기 위해 자문을 구했다. 그런데 그 판매원이 아내가 한국인이냐고 묻는다. 한국인이라는 내 대답에 의외의 대답을 들려준다. 인종과 민족마다 피부톤과 살결이 다르고, 같은 민족이라도 사는 곳이 다르면 보습이니 유분함량이니 하는 화장품에 대한 요구사항이 다르다는 것이다. 그러니 화장품은 각자 자기 나라에서 만든 것을 사 쓰던가, 아님 최소한 그 지역에 맞춰 생산한 글로벌 브랜드 제품을 쓰라는 것이었다.

 

아프리카 흑인 여성들도 기초화장은 물론 색조화장을 한다. 또한, 아프리카인들의 패션감각은 남다른 데가 있다. 오렌지색 셔츠에 카키색 정장을 입는다든지 하는 파격적인 옷을 입고는 하는데, 피부색이 다른 한국인은 감당할 수 있는 배색이 아니다. 피부색이 다른 것이 영향을 미치는 분야는 화장과 패션으로만 국한되지 않는다. 기록으로 남는 사진의 경우에는 문제가 더 복잡하다. 아프리카 사람들과 사진을 찍으면 종종 사진이 기묘하게 나온다. 배경이 어두우면 인물이 배경색과 동화되어 묻혀버리기 일쑤고, 밝은색 옷을 입으면 옷만 동동 떠있다. 또한, 카메라나 스마트폰이 보통 자동 초점, 자동 노출 상태로 설정되어 있으면 얼굴빛이 밝은 사람에게 기준을 두고 찍히는 모양이다. 게다가 플래시를 터뜨리면 눈의 흰자위가 붉게 찍히는 적목(赤目) 현상이 유독 흑인들에게는 더 심하게 나타난다.

 

그런데 아프리카에서 가발과 더불어 한국인이 가장 성공한 업종이 바로 사진관이다. 사무실마다 걸려있는 대통령 사진이 대부분 한국인의 손을 거쳤다고 보면 될 정도로 압도적인 성공사례였다. 얼마나 한국인들의 사진관이 높은 위상을 차지했는지 필자가 직접 체험한 바 있다.

 

한번은 꽤 동떨어진 낯선 지방도시에 출장을 갔는데, 현지 주민들이 필자가 한국인이라니까 한결같이 현지 도시에도 한국인이 사진관을 하고 있다고 들어 그 사진관을 직접 찾아갔다. 사진관 문을 열고 한국어로 인사를 건네자, 거기 사장 내외가 놀라서 쳐다보기만 하였다. 알고 보니 그 사진관 사장 내외는 베트남인이었다. 하도 한국인 사진관사업이 잘되니 한국인들이 없는 곳에 가서 한국인 행세를 하며 사진관을 운영하고 있었던 것이다. 한국인들이 사진에 특별한 기술이 있는 것도 아니고, 아프리카인들이 한국인을 특별히 편애하는 것도 아닌데 베트남인이 한국인 행세를 할 정도로 도대체 어떻게 사진관 사업에서만 독특한 성공을 일구어낼 수 있었을까?

 

우선, 사진관이란 비즈니스에 대해 생각해 보자. 아프리카에서 하는 사진관은 우리가 요즘 서울에서 볼 수 있는, 취직이나 기념이 될만한 연출된 사진을 찍어주는 스튜디오라기 보다는 예전에 필름 카메라 시절에 흔했던 ‘디피점’에 가깝다. 그러니까 Development &Print, 즉 필름을 현상하고 인화지에 찍어내는 기술 중심의 상점인 것이다. 공정도 어려울 것이 없는 것이 거의 전 과정이 자동화되어 있다. 필름을 기계에 걸어만 주면 현상, 인화되어 낱장으로 잘려 착착 쌓일 때까지 별로 손이 갈 것도 없다. 한마디로 겉으로 봐서는 차별화하기 어려운 비즈니스이다. 사진관은 가격이 낮은 비즈니스도 아니다. 한 예로 2002년경 24장짜리 필름 한 통을 맡기면 현상에 6달러, 4ⅹ6 용지 인화에 장당 1달러로 총 30달러나 받았다. 한국에서 같은 것을 맡기면 현상료 따로 없이 인화료만 장당 300~400원 수준으로 같은 24장짜리 필름 한 통이라면 10달러가 채 되지 않을 때였다.

 

한국인 사진관의 성공비결을 물으면, 대표적인 대답이 한국인 특유의 근면함과 상재(商才)라는 것이다. 그런 일반적 특성이 비결이라면 한국인은 세계 모든 지역에서 모든 비즈니스에서 성공해야 하는데, 아시다시피 그렇지는 않다. 또한, 아프리카인들이 한국인보다 근면하지 않다는 것은 상당 부분 오해에서 비롯된 편견이다. 현지에서 맞닥트리는 외국인들인 인도인, 레바논인, 중국인, 베트남인 또한 한국인보다 근면하지 않고 상재에서 뒤진다고 하는 것 역시 보편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생각이다.

 

일단, 현지인들에게 왜 한국인 사진관에 가는지 물어봤다. 주인이 인간적이다, 친절하다, 사진이 빨리 나온다 등 주관적 대답이 일부 있기는 있었다. 덤을 줘서 좋다는 단순한 사람도 있었는데, 사진을 찾으러 가면 사진관 사장이 새 필름 한 통을 거저 주기 때문에 그런 생각을 하는 모양이었다. 그런데, 필름 판매가격이 얼마 되지도 않았을 뿐더러 모든 고객에게 그렇게 하기 때문에 이미 원가화되어 있어, 정말 단순한 사람이 아니면 덤으로 생각하지도 않았을 일이다. 또, 그게 비밀이라면 주위에서 고전하고 있는 베트남 사람들이 금방 따라 하지 않았겠는가?

 

실제 아프리카에서 사진관을 오랫 동안 경영했던 분들에게 물어서 대략 3가지로 성공요인을 정리해보았다.

 

첫째, 적기에 들어간 과감한 투자다.

 

최초의 한국인 사진관은 1981년도(우연인지 가발사업이 시작된 때와 같은 해이다.) 나이지리아의 뉴욕으로 불리는 라고스에 진출한 ‘타이가상사’다. 당시 라고스에서는 흑백사진만 뽑을 수 있고, 칼라사진은 필름을 우편환과 함께 첨부해 유럽에 보내 적어도 2, 3주 후에나 받아볼 수 있었다. 그래서 당시 한국에서 유행하던 즉석 현상, 인화기인 QSS(Quick Service System)를 가져다 사진관을 여니 그야말로 대박이었다. 선진국에는 이미 일반화되어 있던 그 QSS가 아프리카 현지에는 거의 없었고, 대부분 약품에 필름이나 인화지를 담가 손으로 흔들어 말려 사진을 뽑았다. 빠르면 4시간, 일이 밀리면 하루 이틀은 기다려야 했다. 불어권에 속한 아프리카의 경우 소수 프랑스인들이 소형 자동화 기계로 현상소를 운영하고 있었으나 가격이 매우 비쌌다. 이런 곳에 QSS는 거의 혁명이었다.

 

또한, 초창기 한국인 사진관은 점포의 ‘목’을 매우 중요시했다. 서구와 달리 고객 대부분이 대중교통을 이용해서 방문하기 때문이다. 월세가 비싸더라도 명동 같은 곳에 자리를 잡았다. 아래 사진에서 보이는 카메룬 수도 야운데 소재 한국인 사진관 역시 시내에서 가장 목이 좋다는 힐튼호텔 바로 옆에 있다.

 

자료원: 카메룬 한재옥님1)

 

이런 여러 요인들로 미루어보았을 때 아프리카 사진관 비즈니스의 첫 번째 비결은 시장의 수요를 읽고 적기에 과감하게 대응했던 마케팅의 승리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비결은 비즈니스맨이라면 누구나 적용 가능한 것이라서 그 이후에 같은 기계를 경쟁업체가 수입하면서 점점 일반화되어갔다.

 

두 번째로는 차별화된 운영이다.

 

초기에 우수한 한국인 기사들을 고용하였다. 한국에 비해 월등히 좋은 가격과 풍부한 수요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래서 유럽인들에게는 가격에서 이기고 현지인들에게는 품질에서 앞설 수 있었다. 지금은 사진도 디지털화해서 인화 기술이 사진 품질에 미치는 영향은 거의 없지만, 아직도 한국인 현상소가 시장에서 버틸 수 이유는 기계가 고장나면 재빨리 수리해서 좀처럼 기계를 세우지 않는 등 유지 운영을 잘 하기 때문이다.

 

한국인이었기 때문에 유리한 점도 없지 않았다. 인화지는 외국산을 그대로 쓸 수 밖에 없었지만, 현상 약품의 경우 한국에서 생산되는 좋은 제품이 있어 상대적으로 싼 값에 수입해 사용할 수 있었다. 또, 한국인만이 건네는 선물이 있었는데 바로 ‘달력’이다. 아프리카 사람들이 좋아하는 12장짜리 달력은 외국인 경쟁자들은 줄 수 없는 인기 최고인 선물이었다.

 

사진관 밖에서는 현지 사진사들을 적절히 양성해 활용했다. 카메라가 일반화되지 않은 점을 고려해 카메라를 들고 다니면서 사진을 찍어 집으로 보내주는, 그러니까 한국에서도 80년대까지 고궁과 동물원, 입학식과 졸업식을 장악했던 그 업종을 아프리카로 수출해 현지화하였다. 이 사진사들의 충성도가 한국인 사진관을 먹여살렸다는 증언도 있다. 디지털 카메라가 일반화되면서 직업사진사는 더욱 중요한 매출원이 되었다. 각각에서 고유번호를 부여하고, 일반인과 다른 가격정책을 적용하여 특별하게 관리하고 있다. 하지만 이것 역시 수긍이 가기는 하지만, 경쟁업체가 따라 하지 못할 비밀은 아니었을 것이다. 다수의 거래처가 존재하고 품질이 비슷한 복수의 공급자 역시 존재한다면, 그것이 바로 경제학 교과서가 말하는 자유경쟁시장이라고 생각하였다. 하지만 이것 역시 독특한 특징은 아니다

 

자료원: 카메룬 한재옥님

 

세번째로는 한국인이 색을 조절하는 신묘한 재주가 있다고들 했다.

 

필자가 현지인들에게서 들은 대답 중에도 상당수가 한국인 사진관에서 사진을 뽑으면 흑인들이 ‘뽀얗게(brighter and clearer)’ 나온다는 것이다. 이 ‘뽀얀 사진’에 대해서 교민들에게서 전해들은 얘기들 중에 가장 신빙성 있어 보이는 설명은 바로 ‘연금술설’이다. 필름 카메라 시절에 세계적인 필름업체가 현상액시장을 통제하는 것은 매우 당연한 것이었다. 마치 요즘 프린터 생산업체가 잉크를 배타적으로 공급하듯 말이다. 따라서, 그 배타성 (exclusivity)를 유지하기 위해서 현상액은 포뮬러(Formula) 형태로 제조되어 공급되고 그 조성 내용은 절대 비밀이다. 코닥이 되었든 후지가 되었든 자사 포뮬러의 독점권을 유지하기 위해 절대 조성을 밝히지 않으며, 포장에다 “이 포뮬러는 지시된 사용법에 따라 사용할 것. 어떤 변경시도도 불허하며, 임의로 변경할 경우 품질을 보장하지 않음.”이라는 식으로 박아놓게 마련이다.

 

그런데, 한국인들은, 그것도 1960년대와 1970년대 엄혹한 권위주의 시대를 살아낸 1980년대 초 아프리카 사진관 사장님들은 코닥과 후지의 권위를 인정하고 싶지 않았는가 보다. 현상액 포뮬러에 뭔가를 넣었다고 한다. 그게 물이었는지, 식초였는지, 또는 설탕이나 표백제였는지 아무도 증언을 해주지 않으니 알 길이 없다. 다만, ‘색을 조절하는 재주’라는 설명이 힌트라면 힌트다. 기계나 인화지 등은 변화를 줄 여지가 별로 없지만, 현상액은 액체이니까 ‘며느리도 모르는’ 비법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아프리카에서 한국인 사진관을 개척한 분들은 한국에서부터 사진 전문가였던 분이 거의 없다. 먼저 사진관을 열었던 사람의 일가친척이나 친구, 또는 어쩌다 같이 일하게 된 직원이 일정 기간 일한 후 독립해나가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것도 아주 멀리. 때로 현지인 직원들도 충성심을 인정받아 고향에 사진관을 차려 금의환향하기도 했다. 아마도 그 포뮬러의 비법을 전수해 주면서 멀리 떠나보내지 않았을까? 라고 추측해 본다.

 

수소문을 해서 아프리카 최초로 사진관을 연 전설 같은 사장님과 연락이 되어 직접 여쭤볼 기회를 가졌다.2) 위에서 언급한 여러 내용에도 이 분의 설명 내용이 포함되어 있지만, 가장 핵심적인 내용은 세번째 비결이라 여겨지던 ‘연금술설’에 대한 대반전이다. 현상액의 조성을 임의로 조정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남들이 아무렇게나 다뤘던 기계를 매뉴얼대로 운용했던 것이 경쟁력이었다는 증언이다. 아래에 그대로 옮겨본다.

 

“아프리카에서는 아직도 아날로그 사진이 상당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그래서 필름 현상기를 아직 사용하는 곳이 꽤 많은데 아날로그 사진의 경우 필름 현상이 중요하다. 사진 인화는 사고가 나거나 색이 나쁠 경우 다시 해줄 수 있지만 필름은 그게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필름 현상에는 발색(developer), 표백(bleach), 정착(fixer), 수세(stabilizer)의 네 가지 약품이 들어간다.

 

인화 약품도 마찬가지이나 표백과 정착이 같이 혼합되어 나온다. 요즘은 디지털프린터 잉크처럼 카트리지 형태로 약품을 장착할 수 있는 기계도 나오나 약품 값이 비싸기 때문에 아프리카에서는 아직도 원액을 사서 물에 희석시켜 사용한다.

 

그런데 약품 값을 절약하기 위해 약품제조회사가 정한 대로 하지 않고 물을 더 많이 넣거나(예컨대 100ℓ를 만들기 위해 원액 10ℓ를 넣어야 할 것을 5ℓ만 사용하거나) 한번 사용한 약품을 재사용하는 경우도 있다. 또 약품을 희석시킬 때 물을 넣어 충분히 잘 섞어 주는 게 중요하므로, 정확한 용량을 제조회사가 지시한 순서에 따라 충분히 희석시켜주어야 좋은 색을 얻을 수 있다. 아프리카인들은 이 과정을 소홀히 한다. 그래서 점포의 틀을 잡는 초창기엔 약품 준비는 반드시 한국인 기사가 해야만 했다.

 

그리고 약품회사가 제시한 기계 온도 설정도 정확히 지켜야 한다. 회사에 따라 약간씩 다르지만, 코닥은 발색 35℃, 표백 36.5℃일 때, 한국 부흥약품은 발색 37℃, 표백 37.5℃ 이런 식으로 매우 정교하게 온도를 지켜야 한다. 또, 모든 기계는 보충량을 조절할 수 있도록 되어 있고 인화가 진행됨에 따라 약품이 자동 보충된다. 이 보충량 기준을 정확히 지켜야 하는데 현지인들은 약품 절약을 위해 줄여서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 이 모든 것이 사진 품질에 영향을 미친다.”

 

한국인 사진관의 성공 비결은 상상했던 것처럼 묘한 데 있지 않았다. 다들 기본을 무시하는 환경에서 꿋꿋하게 기본을 지켜왔던 것이 주효했다. 아프리카에서도, 아니 아프리카일수록 기본은 중요하다.

 

어쨌든 디지털의 시대가 되면서 이제 아날로그 사진관은 사양산업이 되고 말았다. 아직 명맥을 잇고는 있지만 예전에 비하면 엄청 위축된 것은 틀림없다. 현지 시장에 대한 경험을 무기로 어떤 이는 소규모 건설업자가 되기도 하고, 다른 이는 잡화 수입업자가 되기도 한다. 한때 현지에서 일년 동안 번 돈으로 서울에 아파트를 한 채씩 샀다는 얘기들은 이제 전설처럼 들려온다. 한국인이 전성시대를 열 다음 비즈니스는 과연 무엇일까?

 

 1) 카메룬 야운데의 한국인 사진관에 근무하시는 한재옥님이 본 칼럼용으로 직접 찍어 보내주셨다.

 2) 귀한 정보를 아낌없이 공개해 주신 분이지만, 본인 성함을 밝히는 것을 고사하였으므로 밝히지 못하여 아쉽다. 이 자리를 빌어 다시 한번 감사드린다.

 

 

※ 이 원고는 외부 글로벌 지역 전문가가 작성한 정보로 KOTRA의 공식 의견이 아님을 알려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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