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메뉴 바로가기 푸터 바로가기

사이트맵


Book Mark
[전문가 기고] 한국-폴란드 관계의 기원을 찾아서
  • 외부전문가 기고
  • 폴란드
  • 바르샤바무역관 강세나
  • 2013-12-19
  • 출처 : KOTRA

 

한국-폴란드 관계의 기원을 찾아서

바르샤바국립대 국제관계학 연구소 김규남

 

 

 

2013년 10월, 폴란드 코모로프스키 대통령의 방한을 계기로 한국과 폴란드 관계는 ‘전략적 동반자 관계’라는 한층 성숙된 모습으로 성장했다. 1989년 이전에는 공식적으로 교류할 수 없었던 양국이었지만, 24년이 지난 오늘에는 다른 유럽 국가보다 앞선 협력관계를 수립한 것이다. 냉전시기에는 적대국가로 여겨지던 양국이 어떻게 오늘에 와서는 빠르게 밀착할 수 있었던 것인가? 단지 세계화의 흐름에 따른 결과로밖에 표현할 수 없는 것인가? 이 물음을 풀기 위해서 한국과 폴란드 관계의 기원을 추적해보고 현재의 양국 관계를 설명할 수 있는 과거와 현재의 연결고리를 밝혀보고자 한다.

 

19세기 말, 한국이 대한제국으로 독립국의 명맥을 유지하고 있던 시기 폴란드는 주변 세 나라(독일, 러시아, 오스트리아)에 의해 분할 통치되고 있었다. 그리고 폴란드가 독립을 쟁취한 1918년에는 반대로 한국이 일본제국주의에 의해 강점을 당하고 있었다. 따라서 두 나라는 유럽과 아시아의 본격적인 교류가 이루어진 근대화 시기에 외교적 접점을 찾기 어려운 사이였던 것이다. 그 예로 1896년 고종황제의 외교 사절단으로 러시아를 방문한 민영환, 윤치호, 김득련 등의 일행은 그 해 5월 당시 러시아의 식민지였던 바르샤바에 들려 망국(亡國)의 풍경을 보고서에 기록했다. 그러나 1927년, 고종황제의 아들인 의민태자(영친왕)는 일본의 왕실 사절단 자격으로 바르샤바를 방문했고 폴란드의 독립 영웅이자 새로운 지도자인 유제프 피우수츠키를 만나 냉정한 시대의 변화를 느껴야 했다. 이후 제2차 세계대전 발발과 종전을 통해 세계 정치와 지도는 빠른 속도로 재편됐고 냉전의 시작과 함께 한국과 폴란드 관계는 새로운 국면을 맞이한다.

 

소련에 의해 독일 제국주의 틀에서 벗어난 폴란드는 이내 사회주의의 길로 들어섰고, 1948년 한반도의 북한을 유일한 합법정부로 인정했다. 이어 발발한 6·25 사변에서 폴란드는 줄곧 한국의 북침을 주장하며 국제사회에서 북한과 친밀한 공조를 유지했다. 정전협정 이후에는 중립국 감독위원회의 일원으로서 국제사회에서 북한의 발언에 힘을 실어 주었다. 특히, 전후에는 함흥에 병원을 설립하고, 북한의 전쟁 고아를 1000명 이상 받아주는 등 안보, 경제, 교육, 문화적인 교류를 활발하게 전개해나갔다. 1950년대와 1960년대는 냉전의 지속과 폴란드-북한 간의 밀월관계로 한국-폴란드 관계의 틀이 형성조차 어려웠다. 그런데 1960년대 후반부터 나타난 냉전의 완화(데탕트)와 함께 한국과 폴란드 관계에 새로운 지평이 열리기 시작했다.

 

한국은 1960년대 중반부터 이어진 경제성장을 통해 남북한 체제경쟁에 대한 자신감을 갖게 됐다. 수출 10억 달러를 달성한 1971년, 박정희 대통령은 신년사에서 ‘공산권 국가들과의 교역과 실리외교 가능성’을 발표했다. 그 해 7월, 미국의 닉슨 대통령이 중국 방문을 발표했고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국가 간의 만남이 지속됨에 따라 북한이라는 변수는 한국과 폴란드 관계에서 중요성이 축소되고 있었다. 또 폴란드는 1967년, 사회주의 국가로 GATT(관세무역일반협정, WTO 전신)에 가입했고 자본주의 국가들과의 교역을 점진적으로 증가시키고 있었다. 다시 말해 1) 국제사회의 긴장완화(미-중-소 대화, 남북한 대화) 2) 한국의 할슈타인 원칙폐기(공산권 국가들과의 교류발표) 3) 국제사회 내 북한의 입지약화(1972년 남북한 경제력 역전) 4) 폴란드의 대자본주의 국가 무역증가(서방국가와의 수교) 등이 한국과 폴란드 관계 시작의 요인들이라고 할 수 있다. 실제로 1971년부터 한국과 폴란드는 무역을 시작했다(폴란드 통계청 자료추적 결과).

 

강력한 우방이었던 폴란드가 한국과 교역을 시작하자 이를 저지하기 위한 북한의 움직임도 늘어갔다. 1975년, 당시 주 폴란드 북한대사였던 백남순(이후 외무상)은 폴란드 정부에 남한 체제를 비판하는 TV와 라디오 방송 송출을 요청했다. 1976년 북한은 UNESCO 총회(바르샤바)와 세계청소년펜싱대회(포즈난)에 참가하는 한국 대표단의 비자발급을 중지하라는 요청도 했지만, 대한민국 대표단(당시 대한체육회 부회장 김운용 포함)은 예정대로 참석할 수 있었다. 그리고 1977년 북한은 폴란드 정부에 남한과의 교역을 중단하라는 요청을 했지만, 폴란드 정부는 정치 외의 영역이 정부 권한 밖이라는 소극적인 답변을 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같은 해 박정희 정부는 폴란드어를 배울 국비 유학생을 선발했고 당시 한국외대 독어과 졸업생(정병권 한국외대 폴란드어과 초대교수)이 선발돼 베를린 자유대학에서 수학하며 폴란드어과 설립을 위한 발판을 마련했다. 같은 해 12월 개성의 중립국 감독위원회 폴란드 대표가 서울을 방문해 비밀리에 쇼핑한 것이 폴란드 정부에 발각돼 문책받은 재미있는 사실도 있다. 또한, 스웨덴은 폴란드에 한국과의 수교를 권하며 양국 간 중재자 역할을 하기도 했다.

 

1980년대에는 소련 고르바초프 정부의 개혁, 개방정책, 폴란드 내 자유화 운동, 한국의 적극적인 수출정책과 경제성장, 북한의 국제적 입지 약화(테러 국가 이미지) 등의 요인을 통해 한국과 폴란드의 무역량은 급격하게 늘어났다. 그리고 1987년, 서울올림픽을 1년 앞두고 한국은 폴란드의 참가 확답을 받았고 동시에 북한 사절단은 폴란드 대표단의 참가 거절을 요청했으나 실패했다(1991년에 망명한 북한 외교관 고영환 진술). 결국 88 서울올림픽을 통해 가까워진 양국은 본격적으로 수교협상에 돌입하기에 이르렀다. 1988년 12월, 몬트리올에서 열린 우루과이라운드 회의에서 양국은 비공식으로 수교를 위한 접촉을 가졌고 이듬해 봄부터 상호교환방문을 거치며 마침내 폴란드의 자유화 이후인 1989년 11월 1일 수교를 맺게 됐다. 한국은 수교협상에서 폴란드 측에 4억5000만 달러의 상업차관을 5년간 지급하기로 약속했는데 예전에 폴란드측에서는 10억 달러를 요구하기도 해 한국 측에 부담을 주기도 했다. 폴란드에게 경제적 파트너로서의 한국이 절실히 필요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후 양국은 대우자동차의 번영과 쇠퇴를 통한 성장통을 경험하며 오늘날의 대규모 교역을 이루게 됐다.

 

지금까지 한국과 폴란드 관계의 기원을 살펴보았다. 양국의 희미한 시작점이 19세기 말이라면 뚜렷한 적대관계를 거친 1970년대가 우리 시대의 접촉점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리고 1980년대의 경제, 스포츠 교류를 거쳐 1989년에는 공식적인 접점을 찍은 것이다. 물론 국제사회(미-중-소)의 변화에 따른 양국 관계의 변화로 볼 수도 있겠지만, 한국 정부의 적극적인 대외교역, 스포츠교류, 북방외교 등도 빼놓을 수 없는 주요 배경이 될 것이다. 그리고 지금까지도 양국 관계에서 한국이 적극성과 주도권을 유지하고 있다. 양국의 관계는1989년에 갑자기 시작된 것이 아니라 점진적으로 축적된 관계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앞으로 한국과 폴란드 관계를 바라볼 때 우리의 시야가 1989년부터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관계 지점을 이전의 선배들이 여러 번 두들겼던 ‘응답하라 1971, 1977’로 표현할 수도 있다는 것을 기억하며 양국의 더 풍성한 관계를 위해 달려가야 할 것이다.

 

양국 간 상호인사 팁

 

폴란드를 방문하는 많은 한국인이 ‘한국과 폴란드의 아픈 과거사 공유를 통한 동질감’을 강조한다. 그러나 폴란드는 16세기와 17세기 독일과 러시아, 터키 등을 격파하고 점령하던 유럽의 강대국이었다. 폴란드의 이 시기를 황금기(Golden Age)라고 부른다. 이제는 명예를 중시하는 폴란드인들에게 이렇게 인사해보는 것이 어떨까?

 

"과거의 황금기(Golden Age)를 구가했던 폴란드가 아픔과 시련의 시기를 거쳐 이제는 더욱 성숙된 모습으로 제2의 역사적 전성기를 누릴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한국의 정부 및 기업은 당신들과 폴란드의 제2 전성기를 함께 만들어 가고 싶습니다."

 

우리가 과거를 보는 것은 미래를 지향하기 위함임을 잊지 말자.

 

 

※ 이 원고는 외부 글로벌 지역전문가가 작성한 정보로 KOTRA의 공식적인 의견이 아님을 알려드립니다

<저작권자 : ⓒ KOTRA & KOTRA 해외시장뉴스>

공공누리 제 4유형(출처표시, 상업적 이용금지, 변경금지) - 공공저작물 자유이용허락

KOTRA의 저작물인 ([전문가 기고] 한국-폴란드 관계의 기원을 찾아서)의 경우 ‘공공누리 제4 유형: 출처표시+상업적 이용금지+변경금지’ 조건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다만, 사진, 이미지의 경우 제3자에게 저작권이 있으므로 사용할 수 없습니다.

댓글

0
로그인 후 의견을 남겨주세요.
댓글 입력
0 / 1000